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각종 세일들이 즐비하고, 또 크리스마스 당일에 다가오면 막바지 세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 물건을 산다면 우리는 여러가지 장단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장점이라고 하면 반값세일, 혹은 1+1같은 세일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단점은 크리스마스 시즌 초기에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모두 사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우리가 원하는 상품을 고를 기회가 거의 없고, 다른 사람이 사고 남은 상품 중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 맘에 드는 것을 고르기 힘들다는 데 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사역 홈페이지에 보면 크리스마스 막바지 쇼핑에서의 이같은 상황과 비슷한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내 사촌은 방탕한 생활을 항상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죽기 전에 구원받을 자신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죽기 직전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고, 또 천국에 들어올 것을 허락해주실 거라고 굳게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맞는 건가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성경 말씀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양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범죄 사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공공의 십자가 처형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여러가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임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 후로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비를 구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이는 죽기 바로 직전 낙원을 선물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에서 모든 이들에게 차별이 있을 수 없기에 자신의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오는 이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상담 질문에 대한 빌리 그래함의 대답 역시도 “YES”, 그의 사촌은 구원받을 수 있다 였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는 것도 다행일 수 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숨겨진 위험이 있다.
첫째,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데 있다.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나 심장마비, 혹은 자동차 사고 등 예고없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에 우리가 회개살 수 있는 기회 조차 없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둘째, 우리의 삶을 반추했을 때 아쉬움과 회한의 시간만이 남을 수 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
자신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과연 어떤 기록이 자신에게 남겨질까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개신교 성경책에는 이 십자가상의 강도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가톨릭 전통에서는 그는 “성 디스마스(St. Dismas), 좋은 도둑”이라고 부른다. 비록 그가 죽기 직전 구원을 선물받았지만 그의 삶의 기록에는 항상 그의 과거가 범죄기록처럼 따라온다, “구원받은 강도”로.
이렇듯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고, 또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는 시간을 갖지 못할 수도 있기에 마지막 구원만을 바라고 방탕하게 우리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마지막 구원의 아쉬움이 얼마나 큰지를 더 자세히 생각해 볼 수 있다. 탕자의 이야기의 대부분의 결론은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환대를 받으며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어두운 면은 여기에 있다.
탕자가 비록 아버지께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는 이미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유산을 모두 탕진했고, 비록 그가 아버지와 함께 살기는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을 유산이 더 이상은 없다. 다만 그의 고백처럼 아버지의 집의 종의 한명처럼 여김을 받아도 좋겠다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늘 아버지와 함께 있던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 것이로다(눅 15:31)”. 비록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못했었지만, 탕자의 비유에 감춰진 메시지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국에서 상급이 없는 구원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경에서는 구원과 상급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구원은 받을 자격이 없는 누구에게든 허락된 하나님의 호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나 상급은 마치 은행에 예금을 보유한 것처럼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과 같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고전 3:8)”.
그리고 나중에 우리의 공적이 나타날 때가 있을텐데 그 공적이 어떠한 것인지 시험받을 때가 있을 때, 그의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겠지만, 혹 그의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전 3:14-15)고 성경은 말한다. 또 사도 바울 역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4)”고 고백하고 있다. 구원과 상급의 다름을 말씀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죽기 바로 직전에도 구원받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신학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영적인 위험성과 생각지 못한 삶의 고통이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방탕한 삶의 결과는 상급없는 구원일 수 있고, 또 이것이 막바지 구원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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