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수많은 사사가 있었고, 그들 중 우리 기억 속에서 비교적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의 하나는 삼손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틴으로부터 구원하는데 쓰임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럴듯한 군대도 없었고, 돕는 자도 없었으며, 심지어 오직 자기 자신의 힘으로만 싸움에 나가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이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던 사람이다. 나실인은 세상의 그 누구와도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없는 선민같았다. 머리에 삭도를 댈 수도없었고, 포도주를 먹어서도 안되며, 시체를 가까이 하여 몸을 더럽혀도 안된다. 어쩌면 나실인으로의 삶이 주어져 그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또 다른 나실인인 세례 요한은 삼손처럼 구별된 사람으로서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고 특별한 사명을 위해 삶을 살았지만, 그는 수많은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살아왔다.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사역을 했으며, 무리와 떨어진 깊은 산 속이나 광야가 아닌 누구나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지금 전세계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주의 깊게 실천하고 있다. 아직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은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며, 바이러스의전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차단하며, 스스로 자신을 지켜나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차단시키고 홀로 집에 머물며 외롭게 지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특히 혼자 사는 어르신들의 경우 하루 동안 단 한마디의 말을 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가지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물리적, 지리적인 거리두기이긴 하지만 영적, 심리적 거리두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서로 얼굴을 맞대어 인사를 나누고, 손을 잡고 악수를 하고, 서로 안아주며 반가움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는 결코 멀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삼손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이같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적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눈이 뽑혀지고, 사람들의 잔치자리의 조롱거리가 되어 맷돌을 돌려야 하는 그 순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리고 그의 힘이 다시 돌아와 마지막으로 자신을 조롱하던 원수들과 함께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여기서 우린 다시 삼손의기도 응답의 장소인  “엔학고레” 즉 “부르짖는 자의 샘”을 떠올려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직접적인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잠재적 바이러스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하나님과의 깊은 연결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부르짖는 자의 샘에 물이 터지게 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사사기 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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