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챤은 착하고, 잘 웃고, 잰틀하고, 사랑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다혈질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날 밤, 대제사장의 하인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릴 정도로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 많은 크리스챤의 이미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항상 웃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다른 누구,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크리스챤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난 후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주저함없이 “네, 주님. 제가 다른 무엇보다, 다른 누구보다 주님을 가장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입니까? 물론 우리의 대답이 YES일 것이라고 믿지만, 혹 그렇지 않고 잠시 생각하는 타임을 갖는다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뜨뜨미지근한 사랑은 아닐까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우리라면, 입에서 뱉어버리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분명해야 합니다. 마치 카프치노는 핫으로 마셔야 제맛이고, 카라멜 마끼야또는 아이스로 마셔야 맜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책임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좋아한다는 고백과 가장 큰 차이점은 책임의 유무입니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화이트 초콜릿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화이트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말이지, 그것을 사랑하니까 영원히 그 초콜릿만먹어야 한다는 책임은 없습니다. Sea Salt초콜릿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 Sea Salt를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아무리 말썸을 부려도, 반면에 친구의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착하다 할찌라도, 당신은 사랑하는 자녀를 친구의 자녀와 바꿀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사랑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이 목숨까지 내어주는 책임지는 사랑이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영적으로 부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즉, 하나님 앞에서 거짓없는 순전한 믿음을 가지라.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즉,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의 순결함과 의도의 순수성을 가지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즉,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오면 그분의 풍성한 사랑으로 부요해질 수 있지만, 우리 역시 분명하고 확신있는 사랑의 고백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또 그 사랑에 책임지는 우리여야 하겠습니다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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