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B-1-b. 분석심리학에 관한 이해
프로이트는 수많은 임상기록지를 남김으로서 후대의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융은 모든 사람이 그들만의 창의성과 독특성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하였다. 프로이트는 사람이 가진 창의적 에너지를 히스테리(hysteria)나 신경증(neurosis)이라는 해석의 틀로 보았지만 융은 인간의 창조성을 그저 인간 본연의 힘으로 보았다.
융은 인간의 의식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고 무의식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융은 무의식에는 개인적 무의식과 보편적 무의식(집합적 무의식)의 두 종류가 있다고 상정했으며 보편적 무의식의 개념은 융의 분석심리학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융에게 있어서 의식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었을까?
첫째, 의식은 사람이 외부적 상황을 인식(認識)하고 그 상황에 적응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이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무의식의 내용들까지도 인식하여 정신적인 발달을 돕는데 있다. 둘째, 의식은 분화(分化)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갑자기 미워지거나 짜증이 날 때 우리는 그런 감정에 지배를 받아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때 자신의 감정이 왜 그런지 찬찬히 들여다보며 이것저것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셋째, 의식은 인식과 분화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통합하여 상황에 더 잘 적응하게 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통합되면 인간에게는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그러나 의식이 무의식에서 흘러나오는 요소들을 동화시키지 못하면 사람들은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인 요소들은 태초에 가지고 있던 태고적이고 혼돈된 형식들을 가지고 있어서 의식의 통일체를 부숴버리기 때문이다. 앞서 정신분석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인간이 자기를 글로 표현하려 할 때 이 같은 인간의 의식적 차원에서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의식이라는 또 하나의 발견이 필요하다.
지금부터는 무의식의 작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무의식의 가장 큰 작용은 투사로서 어떤 정신적인 내용이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 붓고 그 사람에게서 그런 특성을 찾는 것이다. 둘째, 무의식은 인간의 자아를 위협하는 요소 즉 성욕·공격욕·가까운 사람에 대한 미움 등을 의식에서 몰아낸다. 셋째, 무의식은 의식이 어느 한 요소에만 과도하게 정신적 에너지를 투여할 때 정신의 전체적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와 반대되는 요소를 강화하는 보상작용(compensation)을 한다. 넷째, 무의식은 자율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그가 말한 집단 무의식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전승되어온 유전적 양식을 말하는 것으로 사회와 문화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은 다르다 할지라도 보편적으로 계승되는 정신적 양식(樣式)이 있다. 인류가 생각하는 부모에 대한 느낌은 나라와 문화를 초월하여 동일하고 어느 나라든지 건국자의 탄생 설화나 신화가 있으며 그들의 인생에는 고난과 역경이 반드시 있었다. 무의식의 심층에는 집단적으로 흐르는 어떤 정신 내용이 있으며 이것이 또한 집단적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특히 융의 이 집단 무의식은 선교사라는 특수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이 ‘선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명자’라는 의미를 담은 표현들로 정의할 것이다. 선교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 같은 보편적인 이해와 시선이 집단무의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한국인이 선교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집단무의식적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집단무의식의 개념이 선교사가 겪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외부로 드러내지 못하고 방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음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살고, 봉사하며, 사역하는 것이 당연한 사명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 주어진 부담과 과제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압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는 심리적 부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흔히 말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어린아이는 사랑받고 칭찬받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행동하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적인 페르조나만으로 살아가려 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융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정신적인 “초점”이나 “매듭”과 같은 것이 콤플렉스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콤플렉스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 감정과 사고의 특별한 복합물이며 자아의식에서부터 분리된 정신요소들로서 언제나 자아의식의 작용을 방해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채우고 있는 핵이 있고 그 핵은 무의식에 존재하고 있기에 때로는 선교사가 느끼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된다. 이 콤플렉스로 인하여 선교사의 정신 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선교사의 정신에 담겨진 감정적인 힘을 전인적으로 통합시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게 된다.
이 무의식에 감춰진 선교사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중요한 인격의 원형들은 참 많다. 페르조나를 비롯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그림자(shadow) 그리고 자기가 여기에 속한다. 이 중에서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내적 갈등과 사회적 환경 요인으로 인해 페르조나의 문제가 공통적으로 나타나기에 이 페르조나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페르조나는 극중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배우가 썼던 가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이 대중에게 보여주는 가면 또는 겉모습이고 여기에는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와는 다른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적응에서 편의상 생긴 기능 콤플렉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환경에 대한 나의 작용과 환경이 나에게 작용하는 체험을 거치는 동안 형성된다. 따라서 이것은 ‘순응(conformity)원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선교사가 속한 사회는 그에게 페르조나를 쓰게 만든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부정적인 감정들과 경험들을 더욱 억압하여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이는 심리적 갈등뿐만 아니라 영적 갈등과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자기표현적 글쓰기는 이 페르조나를 발견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자기를 글로 표현하려 할 때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감추었던 자기 내면의 감정을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적나라게 표현해 볼 때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자기의 모습이 곧 ‘가면을 쓴 나, 나의 페르조나’이다.
융은 페르조나가 세상을 향한 개인의 얼굴이기에 정신의 ‘외면(外面)’이라고 불렀고 반면에 정신의 ‘내면(內面)’을 아니마와 아니무스라 불렀다. 아니마의 원형은 남성 정신의 여성적 측면이고 아니무스의 원형은 여성 정신의 남성적 측면이다. 남자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여성과 접촉함으로써 아니마 원형을 발달시켰고 여성 역시 남성과 접촉함으로써 아니무스 원형을 발달시켰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즉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게 마련이다. 선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 짙게 도사리게 되며 선한 의지를 뚫고 나올 때 나는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선교사들은 의식적으로 자기의 무의식을 살펴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띤다. 선교사가 속한 집단의 사회적 성격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교사가 자기표현적 글쓰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그림자에 직면하여 발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알게 된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여 전체를 이루게 하는 무의식의 원초적 조건으로서 전일의 상징, 대극합일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질서와 조직과 통일의 원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융에게 있어서 모든 인격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다움(selfhood)과 자기실현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며 자기인식이야말로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이다. 이 개성화 과정(the process of individuation)은 자아가 페르조나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고 우리 정신에 있는 그림자를 통합하며 아니마/아니무스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분화시켜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를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더 이상 분열되지 않는(in-divide)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참된 자기를 발견하는 곧 개성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개성화의 과정은 인격의 의식적인 면과 무의식적인 면이 통합(whole)되어 가는 과정으로 일생동안 계속된다. 융에 의하면 분석과 돌봄 모두 영혼을 치유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그렇지만 분석이란 인간 내에 존재하는 온전함을 향한 자발적인 충동을 강화시킴으로서 영혼들을 치료하는 반면 돌봄이란 궁극적으로 한 개인의 이해를 넘어설 만한 어떤 해답이나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사 돌봄은 심리학적 도움 혹은 영적인 도움이라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정의 차원을 넘어 두 가지의 다른 언어를 통합하여 치유와 회복이라는 궁극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융의 이같은 주장은 분석과 영혼돌봄, 즉 심리학과 영성의 통합으로 이루어가는 한 인간의 개성화 과정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연구자가 말하는 자기표현적 글쓰기 치료가 선교사의 심리적 문제를 분석하고 이해하여 영적성장으로 인도하는 전인적 차원의 모델임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된다.
본 절에서 다룬 정신분석과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기억, 즉 과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과거 기억뿐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아 감춰두었던 잊어버린 과거 기억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제부터 다루게 될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과거보다는 “지금-현재”에 더욱 무게를 두게 된다. 자기를 성찰하는 글쓰기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하여 자기를 이해하는 청사진을 제공하기에 자기의 과거를 살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현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연재: 게슈탈트 심리학
(본 연재는 본인의 논문을 정리한 것으로, 홈페이지의 기능적인 면에서 각주를 달 수 없기에 생략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phot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