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A. 선교사에 관한 이해

 “‘선교’라는 단어가 성서에 나오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 개념은 광산에서 광물을 찾아내듯 성서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보쉬(David J. Bosch)는 말하고 있다. 이광순도 선교(mission)라는 단어가 라틴어 동사인 mittere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하고 있고 라틴어 명사형 missio는 ‘내보냄’을 의미하기에 선교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부름을 입은 사람들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선교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하나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전하는 방식이다. 

구약시대의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보자. 그가 처음부터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선교사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생활을 하였고 그것이 곧 선교였던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선교라는 말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사도행전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행적은 선교여행으로 볼 수 있으며 신약의 대부분이 선교 증언임을 간과할 수 없다. 단순히 단어로 선교에 대한 근거를 찾기보다는 의미로서의 선교 개념을 찾는다면 성서에서 상당부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선교가 그러하다면 선교사는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선교사는 성령과 지역교회의 권위를 따라 선교 사명을 감당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서 은사가 있고 열정을 가진 남자와 여자를 가리키며 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든지 부름을 받고 나온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기꺼이 사명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에게 닥칠 문제와 위기를 미리 계산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명에 의한 자발적인 선택이다. 그곳이 어디든 ‘복음’ 때문에 선택한 그 땅이 곧 선교지이다. 본 절에서는 선교사에 관해 성서적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심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선교사의 전인적 영성발달의 필요성을 논할 것이다.

Ⅱ-A-1. 선교사에 관한 성서적 이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 뿐만 아니라 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모세, 요셉을 부르셨고 각 시대마다 사람들을 세워 필요에 합당한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성서에 등장하는 앞의 인물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을 떠나 타문화권으로의 이동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그들이 성서의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믿음의 선조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선교사”의 원형적 모델로서 그 가치를 부여해볼 수 있다. 

본 절에서는 선교사를 성서적 관점에서 그리고 선교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Ⅱ-A-1-a. 선교사에 관한 성서적 이해

성서에 나타난 선교사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에 전임하도록(행 6:4) 하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지역이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리적 또는 문화적 경계를 넘어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선교사는 자기가 거주하는 곳에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내용은 선교사의 성서적 근거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선교적 위임령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과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떠돌아다니던 무리(히브리인)를 야훼의 이름 아래로 모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하나님의 선교(구원)를 위한 도구가 된다. 결국 구약 성서의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선교의 보편성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이 부르신 곳으로, 문화와 환경과 언어를 초월해 나그네의 길을 걷는 선택적 행위이다. 아브라함을 향한 부르심이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부르심이라는 협의적 개념에서 벗어나 인류를 위한 부르심이라는 광의적이고도 보편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게 된다. 

성서에서 선교사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접근은 요나를 통해서 가능하다. 비록 요나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볼 수는 없지만 요나의 회개 기도에 나타난 궁극적인 고백을 통해 선교의 보편성을 간접적으로 선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민족만을 사랑하고 택하셨다는 선민(選民)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이방민족을 향한 복음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선교적 부르심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외침으로 새로운 선교사를 세우셨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대상 혹은 복음 선포의 대상을 이스라엘이 정할 수 없다. 요나는 이런 하나님의 선교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선교사이다. 하나님께서 선교를 주도적으로 행하시며 거기에 요나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선교를 위해 준비하셨고 또 그 선교를 주도하셨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방인에게 펼치셨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선교사를 이해하려고 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신약 시대의 선교는 바로 예수의 선교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의 선교방법이고 동시에 기독교 선교의 핵심이다.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고 지속적인 사랑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며, 여기에서 예수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는 사랑하고, 섬기고, 전하고, 가르치고, 해방하기 위해 세상 속에 보내진 교회이며 예수는 이 같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 파송한 선교사이다. 그분은 목적과 함께 보내심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들, 즉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은(엡 2:1)”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3장 1절과 2절에서 예수를 ‘사도’라 칭하며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했다고 묘사하며 보냄받은 자로서의 삶을 명시하고 있다. 

예수는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파송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파송한 제자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표현한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눅 10:6).”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는 ‘보내신 분’과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이듯이 예수와 제자는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그들 대부분이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그들을 파송하면서 전권 대사를 위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 칭했다. 예수는 이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할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내어 쫒는 권능도 부여하셨다. 특히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위대한 선교사였음을 역사가 증언해주고 있다. 

-다음 연재: 선교사에 대한 선교적 이해

(본 연재는 본인의 논문을 정리한 것으로, 홈페이지의 기능적인 면에서 각주를 달 수 없기에 생략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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