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그만 동네에 빵가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빵집이 하나 생기면서 두 가게는 서로 경쟁하듯 가격을 낮추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이윤을 남기는 마지노선을 넘기면서까지 빵을 팔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두 가게의 주인 둘이 서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가격선을 서로 합의하여 지키기로 약속하고 악수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사들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법적 효력은 없을지라도 두 사람이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엄연한 약속이며 서로가 지키기만 한다면 결코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와 비슷한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양쪽 옆에 달린 두 행악자가 있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저주하였지만 또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 23:42-43).
이 장면에 등장하는 두 인물, 예수님과 한 행악자는 서로 간에 대화하여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 하나의 결정을 이루어 냅니다. 바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약속입니다. 행악자도, 예수님도 자신들의 고백을 바탕으로 미래를 약속하였습니다.
이 행악자는 앞으로 죄를 지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고, 예수님의 자비로 인해 구원을 선물로 받았으니 이 땅에서의 삶이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자비”와 “은혜”는 둘 다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하지만 자비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그분의 능력이지만, 은혜는 어느 한편,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베푸심의 능력만은 아닙니다. 은혜는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서로의 약속과 신의를 지켰을 때 비로서 완성됩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이런 “신사적 합의와 동의”를 이루어 낸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구원이 은혜라고 쉽게 말하지만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주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되려면 쌍방향이 서로 신의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파기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이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은혜의 구원을 받은 자로 살아가야합니다. 어떻게하면 이 Gentleman’s agreement를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수많은 대답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일은 매일의 삶을 성찰하여 혹시 내가 주님과의 약속을 깨버린 것은 없는지 점검하며 감사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