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자율성이 보장된 독립적인 삶을 원하지만 여기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독립을 통해 부모의 간섭으로 자유로워질 수는 있지만, 대신에 매달 내야 하는 월세와 생활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무엘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그 아들들이 사무엘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그들의 이유가 타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요구에 감춰진 두 가지의 나쁜 의도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지도자를 원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자기들 스스로가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들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할 영적 지도자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의 의미는 온백성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는 그 때까지 기다리셨고, 그런 기다림과 회개의 과정을 싫어한 이스라엘을 회개없이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왕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두번째 나쁜 의도는 세상의 가치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그들이 하는데로 삶을 결정하고 싶어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이 그런 것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요청했습니다. 이웃 나라들은 이방신을 섬기며, 원하면 언제든지 신을 바꿀 수 있었기에, 백성들에게 이는 매우 매력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여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고 싶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율적으로 왕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자율성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순종적 관계 안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제외한 수천, 수만 그루의 나무 열매를 공짜로, 노동없이 먹을 수 있었으며, 에덴동산이라는 집에서 공짜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율적으로 선악과를 먹으려고 선택한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벗은 몸의 부끄러움을 알았고, 이는 곧 새로운 삶, 즉 스스로 노동에서 먹을 것을 얻고, 살 집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육체적, 영적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 더 많은 자율성을 얻고 싶었겠지만, 그 자율성은 곧 더 큰 책임과 댓가가 따르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자율성을 얻고 싶어서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상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방법을 더 찾고 찾아 그 분에 머물러야만 진정한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02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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