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의 어떠함을 판단하곤 한다. 크리스챤들이 가지고 있는 영성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개개인의 믿음, 가치,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웨슬리 신학에서 본다면 크리스챤의 영성은 마음과 삶의 거룩함이라 볼 수 있고, 이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 표현할 수 있다. 완전이라는 말이 너무 크고 거창하지만 이 완전은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온전함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챤의 영성에 대한 정의는 개개인의 마음이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 11:7)”. 이 질문의 의미는 “너희가 광야에 나갔을 때 너희는 어떤 의도와 동기로 그곳에 나갔느냐?”이다.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었고, 그들은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갔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선지자에 의해 광야에서 선포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셨던 것이다.
이 질문은 지금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만약 당신이 교회에 간다면, 당신이 교회에 나가는 동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교회에게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고 예배를 드리는가?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 믿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곧 선택된 백성이며 자신들이 그들이라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필요없이 그냥 날 때부터 선민이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이 사실에 동의하셨다. 하지만 이같은 선민의식은 세례 요한까지의 이야기이다.
세례 요한 이후로 하나님은 옛 방식을 끝내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방법을 열어 놓으셨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다시 말해, 생물학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두 종류의 종교인들이 있었다. 한 그룹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즉 나면서부터 유대인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어린 나이에 할례를 받아 평생동안 회당의 정회원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다.
다른 한 그룹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회심하여 신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님은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니고데모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회당의 멤버였지만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의 비밀을 알고 구원의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번째 그룹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릴 때 세례를 받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지만 영적 성숙과 하나님의 나라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그룹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스스로 결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따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야 말로 “천국을 침노하는 자”인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더 이상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개개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책임있는 삶의 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크리스챤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 물로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만약 당신의 가족 중의 누군가가, 혹은 주변의 누군가가 모태 신앙이지만 더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들을 위한 좋은 소식을 한 가지 전해주려 한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할 수 있는 방법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바로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의 이야기이다(막 2:1-4). 중풍병에 걸린 사람의 네 명의 친구들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이 계신 그 집에는 이미 문 입구부터 사람이 꽉 차있어서 도저히 그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예수님께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네 명의 친구들은 지붕에 올라, 그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의 병상을 예수님께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친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나음을 입었다. 마치 침상에 누운 병자처럼 영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면, 지금이야 말로 그 사람의 침대 한 모퉁이를 잡아 그의 병상을 예수님 앞으로 가져가야 할 때이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믿음의 선행이 그 한 모퉁이를 잡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사 그분의 기쁨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한 가지는 천국을 침노할 때 단 한 사람의 노력이나 책임으로는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노력하고 함께 책임을 진다면 가능할 것이다. 마치 중풍병자의 네 명의 친구가 함께 노력하여 병에 걸린 친구를 살려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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