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 질문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된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아퀴나스도 이 질문에 대해 고민했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구글에서 이 질문을 찾아보면 재미있는 대답이 많을 텐데, 그 중 하나는 “닭이 먼저다. 왜냐하면 알을 품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달걀이 닭이 되니까 당연히 닭이 먼저다. 닮이 없으면, 달걀 위에 누가 앉겠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크리스챤이 하나님 앞에서 계속적으로 죄를 범할 수 있을까? 만약 “YES”라면, 크리스챤이 되었으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죄를 짓다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원론적으로 생각한다면, 크리스챤은 반복적이고 자의적으로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가 있다. 이런 것은 실수로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라고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말하기를 “새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를 자동으로 용서받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죄의 용서에 대한 전제 조건은 잘못한 죄를 고백해야만 가능하다는데 있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는 추운 겨울에 눈을 치우기 위해 눈치우는 기계를 운전하다가 기계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봤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순간 그 김이 나오는 곳을 만졌고, 그 순간 “앗차”하면 손이 대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순간적인 유혹에 의해서 죄를 짓지만 그 유혹이 크든 작든지 간에 우리의 영혼에 상처가 나는 것은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혹에 이끌려 생각이나 마음이나 행동으로 죄를 짓게 되면 즉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씻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고의로 지은 죄는 다르다. 고의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이 대한 반역과도 같고, 사람이 죄를 짓고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계속 그 죄 안에 머무르는 행동을 계속하게 되면 이것이 곧 죄의 지속성이다. 누군가가 고의성을 가지고, 혹은 목적있게 죄를 짓는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크리스챤인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전에 머무를 수 있을까? 가장 높고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바로 거룩한 존전이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대제사장만이 사람들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전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속죄를 위한 피를 가지고 나갈 수 있다. 만약 대제사장이 아니거나 혹은 속죄의 피로 씻음받지 못한 사람이 성소에 나아가면 그는 즉각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성막의 지성소는 죄가 없는 곳(sin-free zone)이다. 그곳에서는 죄가 있는 어느 누구도 머무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에 그늘 아래 사는 자(시 91:1)”라고 시편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며 살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갈라졌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또 그분의 보호 아래에 거할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0).
모르고 지은 죄는 마치 흙먼지와 같다. 우리가 더러운 길을 맨발로 걸을 때, 그 먼지가 우리 발에 뭍게 되고, 그 먼지가 뭍은 채로 침대로 올라가지 않는다. 발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된 세상에 살고 있다. 죄로 더러워진 그 상태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기에, 우리는 죄의 고백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더러운 죄를 깨끗히 씻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선명한 가이드라인은 이 말씀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 여기서 기억할 한 가지는, 바로 시간이다. 죄로 부터 자유케 되기 위해서는 죄를 깨달았을 때 즉각적으로 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