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지금을 살아간다. 우리 삶의 끝이 암흑처럼 어둡고 결국 죽음 뿐이라는 결말을 안다면 굳이 지금의 현실에서 열심히 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어둠을 밝히는 햇빛처럼 찬란하고 끝이 없이 영원하다는 결말을 안다면 지금은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그 희망을 바라보며 힘을 내고 용기를 낼 수 있다. 수많은 희망이 우리에게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대담한 희망은 바로 “결코 죽지 않는다”는 확실한 명제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 세 가지의 접근법이 있다.

첫째, 자연적 죽음 혹은 육체적 죽음이다. 예수님을 믿든 안믿는 모든 사람들은 다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자들에게 죽음은 단지 잠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영적 죽음이다. 누구든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여 죄를 짓는다면, 나아가 그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영적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더이상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셋째, 영원한 죽음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 이후에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서의 육체적 삶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살아온 인생이 밝히 보여지고 계산받게 되며, 그분의 심판에 의해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 혹은 지옥에서의 영원한 죽음이 결정된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생명이 있고, 호흡하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산 자로 인정된 자라야 살아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사데교회에서 촉구하시는 것은 바로 회개이다. 회개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도적같이 임하는 주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두 개의 영원(영원한 삶, 영원한 죽음)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러나 이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대로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은 없다(히 9:22)”. 누군가가 피를 흘림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그것이 속죄제물이었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 예수님이 친히 대속의 제물이 되사 우리의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에 따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을 위해 두 가지의 답안이 제시되어 있다. 1번은 빛, 회개의 행위, 영원한 삶이고 2번은 어둠, 회개하지 않는 고집, 영원한 죽음이다. 선택은 우리 몫이고,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우리로 하여금 희망의 연가를 부르게 한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우리가 희망의 연가를 불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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