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A-1-c. 철학적 접근으로서의 자기 인식

(1) 자기 탐색

자기 자신에 대한 탐색은 자기 안의 이질성, 곧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안의 이질성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긍정의 힘을 찾아낸다. 주목할 점은 바로 이 과정에서 타자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길도 열린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이질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기 안의 대극상을 긍정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것, 즉 ‘차이’를 부정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윤리적 성찰의 계기가 열리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자기 정의는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다”라는 정의와 규정을 전제로 하는데 이때 배제된 속성들은 타인에게 투사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이다”라는 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과 배제기제를 외면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가로막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의 철학적 질문은 이처럼 자기와 타인에 대한 규정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자기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그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좀 더 기본적인 절차가 하나 존재한다. 즉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작업’ 즉 자기탐색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경계선을 긋고 그 경계의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을 ‘나’라고 느끼거나 ‘나’라고 부른다면 반면에 그 경계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것(not-self)’으로 느낀다. 자기를 탐색하는 과정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의 본래적 의미를 알 수 없다. 단순히 자기의 성격, 습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장점과 단점과 같은 표면적인 사실로부터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것들이 형성된 배경이 된 내면적인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 발견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상실을 발견하고 위로하는 단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온 ‘자기 거세’ 과정을 재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억압과 상실을 스스로 돌아보고 어루만지는 작업으로서 글쓰기가 새롭게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자기표현적 글쓰기가 궁극적으로 자기 치유를 넘어선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선교사는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자기 거세 과정을 거쳐 왔다. 선교사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당연시 되어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는 사치라고 여겼다. 그래서 어쩌면 무의식에 감추어진 자기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탐색의 글쓰기는 의도된 발화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발화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며 이를 통해 일상적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무의식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또한 ‘자기서사’ 기술로서의 ‘자기탐색’은 자기에 대한 서사적 인식의 내용과 함께 자기 내부의 열등한 측면과 균열 상태에 직면하게 한다. 스스로가 이질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이것과 화해하는 과정은 적극적인 자기 수용과 긍정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자기탐색’과 ‘자기기술’의 과정은 재구성된 기억의 사사를 드러내면서 기억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심리적 상처와 더불어 억압의 과정을 성찰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탐색’의 글쓰기는 자기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2) 자기 이해

자기 탐색의 과정을 거치면 자기가 몰랐던 자기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이해하게 된다. 자기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를 둘러싼 관계와 그 안에서의 질과 양, 가치관, 행동양식, 심신의 상태를 포함한 자기의 전인적 상태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

조해리(Johari)의 창이론에 따르면 <표Ⅰ-1>과 같이 인간관계에는 여러 가지 창이 있다.

  ㉠ 닫혀진 창(암흑의 창)

  ㉡ 깨닫지 못한 창(어둠의 창)

  ㉢ 숨겨진 창(비밀의 창)

  ㉣ 알려진 창(밝은 창)

<표Ⅰ-1> 조해리의 창(Johari’s Window)

㉠은 자신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영역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상호간의 전반적인 관계에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증가하는 등 대인관계의 질과 잠재력에 대한 영향이 감소된다. ㉡은 자신은 모르고 있으나 타인에게는 알려진 영역이다. 이 영역이 크면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부정적인 자신의 특성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효과적인 대인관계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과 ㉡의 영역이 많을수록 자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할 수 없고 긍정적인 자아를 형성하기 어렵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숨겨진 자아, 깨닫지 못한 자아를 발견해내는 글쓰기는 자기 이해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아개념 향상에 도움을 준다. ㉢은 타인은 모르고 자신만 알고 있는 영역이다. 이런 경우 자신의 숨겨진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될 때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감정을 숨기게 된다. ㉣은 자신에 대하여 자신도 알고 타인에게도 알려진 부분이다. 이러한 상태는 타인에 대해 개방적이고, 타인과 조화를 이루기 쉬워 갈등의 소지가 적다.

사회생활에서 자기가 속한 집단의 업무나 과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은 대인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표면적인 문제로만 받아들이고 해결하려고 하지만 실상은 그 문제 안에 얽혀진 개개인의 ‘자기 충돌’로 발생한 외형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아성찰적 글쓰기에서는 글을 쓰는 주체가 곧 글을 읽는 독자가 된다. 그렇게 때문에 이 같은 자기표현적 글쓰기는 자기를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선교사가 경험하는 외형적 사건은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속에서 경험되는 실제(reality)이다. 그리고 이희철에 따르면 그 경험은 때로는 재해석이 필요한 의식절차(ritual)이다. 예를 통해 한 번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책상 위가 엉망인 방에 들어왔다고 가정해보자. 언젠가는 책상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막상 청소를 하려니 피곤하고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책상을 정리하려는 마음은 크지만 정리하고 싶지 않은 욕망 또한 크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들어와 방청소가 끝났냐고 물으신다. 본인은 어머니가 압력을 가한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언니도 이 방을 같이 쓰는데 왜 내가 청소를 해야하지?’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 경우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움직임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하고 지나쳐버리면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을 놓치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일 없이 지나쳐버리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 자기를 탐색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있었다면 이 사건 속에서 또 다른 자기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사례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심리학적 용어는 페르조나(persona)이다. 페르조나란 다소 부정확하고 허약해진 자기상을 일컫는다. 이것은 분노, 자기주장, 성적 충동, 환희, 적대감, 용기,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페르조나 속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성향은 ‘각자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인 ‘척’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데 이처럼 강한 ‘저항’을 갖고 있다. 자신의 원치 않는 측면에 저항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밖으로 투사하기도 한다.

위 사례의 주인공이 자기표현적 글쓰기를 통해 자기를 탐색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가정할 경우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자기의 저항과 페르조나, 그리고 그 형성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을 수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사건을 통해 자기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조해리의 창에 의하면 ‘숨겨진 창’일 수 있다. 타인은 나의 내면의 움직임을 모르지만 자기만은 알고 있는 영역인 것이다. 

특히 선교사는 사회·심리학적으로 볼 때 타인에게 노출된 자기보다 숨겨진 자기, 감춰진 자기가 더 많다. 하지만 자기 발견의 욕구를 가지고 자기와 직면할 용기를 가진다면 다소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자기이해는 자기의 전존재를 인식하고 재해석하기 위한 의식의 한 절차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음 연재: 성서적 접근

(본 연재는 본인의 논문을 정리한 것으로, 홈페이지의 기능적인 면에서 각주를 달 수 없기에 생략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photo on Unsplash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