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법정 드라마를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세 종류의 인물이 있다. 판사, 변호사, 그리고 검사. 그리고 그들이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는 공간이 법정이다. 굳이 깊이 생각을 해보지 않아도 법정 싸움은 양측간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결국 정확한 데이터와 증거의 검토를 통해 판사가 어떤 편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게 된다.
이같은 법정싸움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법원에서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 속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장면에서도 이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깊은 고민에 빠져있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동일하게 예수를 팔게 될 유다 역시 속마음이 복잡한 상태로 그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복잡한 심정을 뒤로한 채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를 직접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으셨지만, 이 말씀은 유다에게 주시는 첫번째 기회이자 경고였다. 유다가 하려고 하는 일을 멈출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두 번째 경고, 정확하게 예수님을 파는 자가 누구인지를 가르키시며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26).” 그리고 유다는 그 떡을 받았고, 그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27).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두 번의 경고를 주셨을 때,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잘못된 동기와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기회를 놓친채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게 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의깊에 살펴보게 되는 것은 유다가 예수님의 떡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하는 말이다. 혹시 이 말이 사단이 유다를 조정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다가 하고 있는 악한 생각을 실행할 수 있도록 사단이 방아쇠를 당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유다가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테지만, 그는 양심의 소리가 아닌 생각의 소리를 듣고 움직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인간의 속사람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증언하고, 동시에 사람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한다(롬 2:15)고 말한다. 즉 인간의 내면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에서 800번 이상 마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감찰하실 수 있고, 그분만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파악하실 수 있다.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의지와 의도도 이곳에서 분명히 파악된다. 두번째 내면은 양심이다. 이 양심은 일반적으로도 옳고 그름에 대해 반응하는 능력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마지막 내면은 생각으로서 모든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개인의 의견이나 감정에 따라, 또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서두에 언급한 법정싸움이 바로 여기서 생생해진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재판관과도 같다. 변호사와 검사가 어떤 사건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든, 우리의 양심과 생각도 대치되어 싸우곤 한다. 우리의 마음이 양심에 의해 움직여지면 우리는 옳은 길을 선택하게 되지만, 우리의 마음이 생각이나 감정을 따라가게 되면 정반대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속사람을 잘 관찰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남편과 산책을 하다가 큰 개가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을 마주치는 상황이 있었다. 목줄없는 큰 개가 우리 앞에 서서 으르렁 거리며 위협할 때, 그 개는 우리에게 위협하며 달려들려한다. 그 순간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가려던 길을 뒤로한채 도망을 쳐버리면 그 개는 도망치는 우리에게 따라와 우리를 물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그 개를 주시하며 “나는 널 무서워하지 않는다. 너의 위협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포즈를 취하고 소리쳤고, 그 때 그 개 주인이 멀리서 개 이름을 불렀고, 그 개는 주인에게 달려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단도 우리가 가려는 길의 길목에 서서 앞으로 가려는 우리의 진로를 방해할 때가 있다. 우리를 죽이려 하기 보다는 우리를 위협해서 그 길을 가지 않고 돌아가도록 만들려는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황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사단의 예상대로 뒤로 물러나 가려던 길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위협을 이겨내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하는가? 가롯 유다는 비록 좋은 동기와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와 달랐을 때 다른 길을 선택했다. 경고도 있었고,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돌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우리의 운명 또한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마음의 자리를 누가 앉아 있는가, 양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은 생각과 감정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이 또한 우리의 선택이다.
202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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