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수많은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비유는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우리를 이해시키는 예수님의 방법이셨기에 그분의 의도와 진의를 잘 파악하는 것이 말씀의 신비로움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 중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비유는 어쩌면 우리 삶의 위선적인 부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세리가 그의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 기도는 세리의 기도보다 의롭지 못했습니다(눅 18:14).
세리의 기도 역시 뭔가 부족한 한 가지가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세리의 직업적 환경때문에 그런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와는 달리 자신의 직업세계로 돌아가면 자신이 기도한만큼 정직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기도는 하지만 그의 삶과 행동에는 변화가 없이 똑같은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그렇게 변함없는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기도하지만 실상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가 기도한 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비유에 앞서 한 과부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원수에 대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을 찾아가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 재판장은 그 과부가 자신을 너무 번거롭게 해서 그 원한을 풀어줍니다.
예수님 당시의 과부들의 지위를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편을 잃은 과부들은 힘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땅을 살때도, 집을 살 때도, 심지어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 일을 대신 해결해줄 남자 즉 기업 무를 자가 필요했습니다. 이 과부는 어려운 일이 있었고, 또 원수가 있었지만 이를 해결해줄 남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에서 가장 힘이 센 한 남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데 그가 그 고을을 재판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녀를 절망에서 건져내줄 “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방 땅에서 자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가 고향땅에 돌아왔을 때 자신과 자신의 며느리는 과부였기에 과거의 자신의 땅도, 직업도, 집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서 기업을 물어줄 보아스를 만났을 때 그들의 원한도, 어려움도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바로 Redemer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아스는 오실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나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불의, 죄에 대한 내용을 기도하지만 과부의 기도는 원한을 풀어줄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가지의 비유가 새로운 연결고리를 갖고 제게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필요를 구하는 구체적인 내용의 무엇이라기 보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기도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기도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기도, 그것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대학시절 제자훈련을 하면서 배운 훈련이 생각이 납니다. “은사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은사를 주는 분을 구할 것인가?”
우리의 기도가 Gift가 아니라 Giver를 구하는 기도이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