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최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병이 든 아하시야 왕이 이방신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인지 물으러 사신을 보냈고, 엘리야는 이를 보고 그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왕은 오십부장과 군사를 보내 엘리야를 데려오라고 했지만 엘리야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 앞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찾아온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에게도 동일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세번째로 온 오십부장과 오십명의 생명은 살려 주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오십부장!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에 이들의 최후가 달라졌던 것일까요?

앞의 두 오십부장은 왕이 엘리야를 대하는 태도, 즉 하나님을 없이 여기고 오만한 자세로 하나님의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그렇게 엘리야에게 찾아와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 오십부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엘리야 앞에서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절히 구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13)”라고 간청했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를 따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행동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태도, 그것이 있고 없고는 대단히 큰 차이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발견은 엘리야가 괜히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두 오십부장과 군사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오십부장이 엘리야를 부를 때,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불렀지만, 히브리 원어에서 이 “사람”이란 단어와 “불”이라는 단어는 어포스트로피 하나 차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불렀다고는 하지만, 그 말에는 과거 갈멜산 사건으로 인해 불의 전사로 기억되는 엘리야를 “불의 사람이여”라고 부르며, 말장난치고, 하대하고, 조롱하는 말투가 담겨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엘리야가 불을 내려 이들을 죽게 할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로서 이 장면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점점 사람에 대한 존중과 존경심을 잃어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궁극적인 권위자이신 하나님을 얼마나 존중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진지하게 살펴보면 우리 양심이 그 답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 양심과 깊이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생각, 감정, 지적 작용의 집합체이기때문에 “마음가는대로”하라는 말을 따르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가 영향을 받은대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잘못된 믿음을 갖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신성하게 창조하신 공간으로서 그분의 영을 그 안에 두셨기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 이 자세가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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